한글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문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배우고 평생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조선 말기, 한글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 가운데 하나"라고 높이 평가한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입니다.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자로 살 수 있었지만, 스물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조선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한글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다 생의 마지막까지 한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한국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외국인, 호머 헐버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조선으로 오게 된 미국 청년
호머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교육자이자 목사였고, 어머니 역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다트머스대학교를 졸업한 뒤 신학을 공부하던 젊은 지식인이었습니다.
그가 조선을 알게 된 것은 미국 정부가 조선에 파견할 교사를 모집하면서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한 뒤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근대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미국 정부에 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그 결과 세워진 학교가 육영공원이었습니다.
1886년, 스물세 살이던 헐버트는 육영공원의 교사로 조선에 오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그가 평생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놀라다
조선에 도착한 헐버트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먼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글을 배운 지 불과 나흘 만에 읽고 쓰기 시작했고, 몇 달 뒤에는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글을 공부하면서 그는 이 문자의 구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배우기 쉽고, 소리를 정확하게 적을 수 있으며, 원리가 체계적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서양에서도 한글을 연구한 사람이 거의 없던 시기였지만, 헐버트는 한글이 매우 뛰어난 문자라고 평가했습니다.
왜 이렇게 좋은 문자를 쓰지 않을까
하지만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정작 조선 사람들은 한글보다 한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반들은 공식 문서와 학문을 대부분 한자로 기록했고, 한글은 여성이나 평민들이 사용하는 글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민필지』 머리말에서 조선 사람들이 한글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한글이 중심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의 예상은 거의 그대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순한글 교과서를 만들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또 다른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한글로 된 교재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책을 쓰기로 합니다.
1891년에 출간한 『사민필지』는 세계지리를 설명한 교과서였습니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자를 거의 쓰지 않고 한글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헐버트는 많은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은 일부 계층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담긴 책이었습니다.
독립신문과 한글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순한글 신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헐버트는 이 신문을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특히 읽기 쉽도록 띄어쓰기와 문장부호를 사용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제안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띄어쓰기가 한 번에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도들은 이후 한글 표기법이 발전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연스럽게 읽는 글의 모습도 이런 노력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교육자에서 독립운동의 조력자로
헐버트는 단순히 학교에서 학생만 가르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고종의 신임을 받아 외교 문제를 돕기도 했고, 해외에서 대한제국의 입장을 알리는 일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결국 조선에서 추방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한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강연을 하고 글을 쓰며 한국의 독립을 계속 알렸습니다.
마지막까지 한국을 선택하다
광복 이후인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헐버트는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다시 오고 싶어 했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고령이었던 그는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은 지금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헐버트 박사의 묘
그의 뜻에 따라 현재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태극장을 추서했습니다.
호머 헐버트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글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봤고, 한국의 교육과 독립을 위해 평생 힘을 보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한글이 얼마나 훌륭한 문자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글을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매일 쓰는 이 글자를 누구보다 아끼고 연구했던 한 미국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서울 사람들에게 신당동은 떡볶이의 도시입니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이제 서울을 대표하는 먹거리 명소가 되었죠. 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신당동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떡볶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당동은 '무녀들이 모여 사는 마을', 다시 말해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무속의 중심지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독특한 역사가 조선 건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선택이, 훗날 신당동을 무녀촌으로 만드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신당동 떡볶이 타운
원래 신당동은 '새로운 집'이 아니라 '신의 집'이었다
오늘날 신당동은 새 신(新), 집 당(堂)을 쓰는 新堂洞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마을' 정도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래 이곳의 이름은 귀신 신(神), 집 당(堂)을 쓰는 神堂洞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당'은 신을 모시는 사당이자 무당이 굿을 하는 장소를 뜻합니다. 말 그대로 '신당이 많은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미신을 배격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같은 발음의 新堂으로 한자가 바뀌었습니다. 이름은 그대로 남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역사 속으로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무당들이 신당동으로 모여든 이유
왜 하필 신당동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시대 한양의 성문 가운데 하나였던 광희문에 있습니다. 광희문은 다른 성문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시신을 아무 문으로나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광희문은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대표적인 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희문을 시구문(屍口門), 즉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장례 의식과 굿을 담당하는 무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공동묘지가 늘어나고 신당이 하나둘 세워지면서, 광희문 밖 마을은 점차 서울 최대의 무녀촌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남산에서 흘러내리던 개천을 '무당천', 그 위의 다리를 '무당교'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을 만큼, 무속은 이 지역의 일상이었습니다.
시대별 찍힌 광화문의 모습
무녀는 점쟁이만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무당을 주로 점을 보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조선시대의 무녀는 훨씬 다양한 역할을 했습니다. 굿을 통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장례 의식을 주관했으며, 액막이를 해주고 병을 치료하는 민간 의료인의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많은 서민들이 의원보다 무녀를 먼저 찾았습니다.
실제로 조선의 서민 의료기관인 활인서에는 무녀들이 함께 활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의사를 뜻하는 한자 역시 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오늘날 사용하는 '醫'보다 오래된 글자인 '毉'에는 무당을 뜻하는 巫가 들어 있습니다. 치료와 주술이 하나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흔적입니다.
죽음의 공간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광희문 밖은 단순히 무녀들만 모여 살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공동묘지가 들어섰고,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빈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까지 설치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신당동이 지금도 유난히 골목이 많고 오래된 주택과 공방이 남아 있는 이유도 이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장간 거리와 개미골목, 오래된 문화주택들은 그 시절의 흔적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떡볶이 이전의 신당동
오늘날 신당동을 대표하는 것은 떡볶이입니다. 1960~70년대 떡볶이 골목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신당동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신당동은 무녀촌이자 장례 문화의 중심지였고, 서민들이 병을 고치고 굿을 하러 찾던 장소였습니다. 도시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이야기로 덮이지만, 오래된 지명과 골목은 그 이전의 역사를 조용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바꾼 것은 왕조만이 아니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습니다. 수도가 옮겨지자 성곽이 세워지고, 광희문은 시신이 드나드는 시구문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공동묘지가 형성되고, 무녀들이 모여들었으며, 결국 '신당(神堂)'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탄생했습니다. 물론 신당동이 생겨난 이유를 모두 이성계 한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양 천도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당동의 역사 역시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왕조를 바꾸기 위해 내린 한 번의 정치적 결단이 수백 년 뒤 서울의 도시 문화와 민간신앙, 그리고 한 동네의 이름에까지 영향을 남긴 셈입니다.
신당동 떡볶이
지금의 신당동은 떡볶이와 맛집, 개성 있는 카페가 가득한 서울의 인기 동네입니다. 하지만 골목을 조금만 천천히 걸어보면, 그 화려한 풍경 아래에는 또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광희문을 지나던 장례 행렬, 굿을 준비하던 무녀들, 병을 고치기 위해 신당을 찾던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고 이곳에 정착했던 서민들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오늘의 신당동을 만들었습니다. 다음에 신당동을 방문하게 된다면 떡볶이 한 접시만 맛보고 돌아오기보다는, 광희문과 오래된 골목도 함께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일성이 묘향산 향산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발표한 공식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 쇼크사'였습니다.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2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사망 이후 독살설 같은 극단적인 음모론이 돌기도 했으나, 언론사의 취재 기록과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타살의 흔적은 없습니다. 다만 당일 의료진 배치와 구조 과정에서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정황이 발견되면서, 후계자인 김정일이 이를 의도적으로 방조한 것이 아니냐는 '합법적 방치'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의혹: 전담 주치의의 동행 배제
당시 김일성은 82세의 고령이었고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상회담 준비로 인해 의학적인 관리가 시급한 상태였습니다. 북한의 프로토콜상 최고 지도자가 이동할 때는 평양 봉화진료소의 심장 전문 주치의가 항상 동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일 묘향산 향산별장에는 심장 전문의가 없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인사권을 쥐고 있던 김정일이 평양을 떠나기 직전 주치의에게 "평양에 남아 다른 간부들의 진료를 보라"고 지시하면서 동행에서 제외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 곁에는 응급 처치 능력이 부족한 일반 군의관들과 기초적인 의료 장비만 남겨졌습니다. 고령의 환자를 일부러 의료 공백 지역에 고립시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2. 두 번째 의혹: 구조 헬기 지연과 추락
7월 7일 밤, 김일성이 심장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습니다. 현장의 군의관들은 평양의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심장 전문의와 응급 장비를 실은 구조 헬기를 다급하게 요청했습니다. 골든타임을 지켜야 하는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평양에서 출발한 첫 번째 구조 헬기가 묘향산으로 오던 중 산에 부딪혀 추락했습니다. 팩트를 확인해 보면 이는 고의 격추가 아니라 북한군의 낙후된 기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북한 헬기들은 야간 비행 장비나 레이더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필 그날 밤 묘향산에는 폭풍우가 치고 안개가 심했습니다.
다만, 아무리 야간 기상 악화라 하더라도 최고 지도자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낡은 자재를 무리하게 투입해 구조를 지연시켰다는 점, 그리고 첫 번째 헬기가 추락한 후 두 번째 헬기가 도착해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골든타임이 몇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는 점에서 구조 시스템이 고의로 마비되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3. 세 번째 의혹: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권력 갈등
김정일이 이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지 않고 방치했다는 의혹의 배경에는 내부 권력 갈등이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 북한은 경제 파탄으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김일성은 분노했고, 경제 실패의 책임이 있는 김정일을 배제한 채 대한민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뉴스
만약 이 회담이 성공하여 경제가 개방되면, 군부를 앞세워 독재를 굳히려던 김정일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김일성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향산별장에서 간부들을 모아놓고 김정일의 경제 실패를 강하게 질책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추진하는 정상회담을 어떻게든 멈춰야만 권력을 지킬 수 있는 정치적 동기가 확실했던 상황이었습니다.
4. 17년 뒤의 데자뷔: 아들 김정일의 죽음과 다른 점
역사의 아이러니는 17년 뒤인 2011년 12월 17일, 아들 김정일 역시 아버지와 똑같은 원인인 '중증 급성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면서 발생합니다. 두 독재자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가장 다른 점은 의료진의 배치입니다. 김일성은 쓰러질 당시 김정일의 지시로 주치의가 평양에 대기하여 현장에 심장 전문의가 없었습니다. 반면 김정일은 평수 지병 관리를 위해 자신의 현지 지도 전용 열차에 늘 최고급 의료 장비와 전담 주치의를 태우고 다녔습니다.
구조가 실패한 원인도 다릅니다. 김일성은 국가적인 구조 시스템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지연되며 방치 의혹을 남겼습니다. 반면 김정일은 한겨울 한파 속에서 달리는 열차 안이라는 물리적 공간 한계 때문에 응급 처치 장비를 제대로 쓰지 못해 사망했습니다. 즉, 김일성의 죽음은 '의도적 방치 의혹'에 가깝고, 김정일의 죽음은 인프라의 한계가 낳은 '현실적인 급사'에 가깝습니다.
부검을 활용한 후계자들의 정치적 계산
두 사건 모두 사망 직후 '부검(시신 해부)'을 신속하게 진행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향할지 모르는 내부의 의혹을 차단하려는 후계자들의 공통된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아버지가 죽자마자 부검을 지시하여 타살이나 독살 흔적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자신에게 쏠릴 시해 의혹을 의학적 자연사라는 방패로 막아낸 것입니다. 17년 뒤 김정은 역시 아버지가 사망한 바로 다음 날 부검을 실시하고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아버지가 과로로 인해 '열차 안에서 순직'했음을 명확히 하여,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명분으로 활용했습니다.
김정일이 직접 아버지를 시해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문책하고 권력을 회수하려던 아버지가 외딴곳에서 쓰러졌을 때, 국가의 응급 구조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환경을 묵인하고 지켜보았다는 '합법적 방치 의혹'은 17년 뒤 본인의 허망한 죽음과 겹쳐지며 여전히 깊은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정말 많은 축제가 열립니다. 예쁜 꽃구경이나 맛있는 먹거리도 참 좋지만, 혹시 경기도 안성에서 매년 열리는 '바우덕이 축제'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바우덕이가 대체 누구지? 사람 이름인가?" 하고 생소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조선 시대에 철저했던 계급 사회를 오직 '실력 하나'로 정면 돌파했던 천재 여성 아티스트입니다. 교과서에서는 깊게 다루지 않지만, 알면 알수록 가슴이 뭉클해지고 영화보다 더 극적인 바우덕이와 남사당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주 자세하게 들려드리겠습니다.
1. 노비보다 낮았던 천민들의 서글픈 유랑, 남사당패
이야기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장터를 돌며 노래하고 줄을 타던 '남사당패'는 지금으로 치면 대중문화를 이끌던 연예인이지만, 그 시절에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천민 중의 천민'이었습니다. 심지어 일반 노비들은 주인이라도 있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나라에서 보호받지 못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절한 유랑의 길을 걸었습니다. 일종의 '법 밖의 사람들'이었던 셈입니다.
남사당패와 바우덕이.
게다가 이 조직은 거친 사내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다니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무리였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이 대중 앞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금기였기 때문에, 남사당패에서 여성 역할이 필요할 때는 젊은 남사당 사내가 치마를 입고 여장을 한 채 공연을 펼쳤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을 '여장 남자'라는 뜻으로 가열(가얏고를 타는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험악하고 거친 무리가 정착하여 겨울을 나고 기예를 갈고닦던 본거지가 바로 경기도 안성의 서운산 자락에 있는 ‘청룡사’라는 사찰이었습니다. 당시 청룡사는 재정적으로 무척 핍절한 상태였는데, 남사당패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신변을 보호해 주는 대신 공연 수익의 일부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사찰에서는 신도들이 천민들과 엮이는 걸 꺼렸지만, 절을 유지하기 위해 이 유랑 예인 집단과 은밀한 상부상조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특히 안성은 전국의 온갖 장사꾼과 물산이 모여드는 조선 최대의 장터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남사당패가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달래주며 그들만의 독보적인 기예를 완성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2. 5살에 입단한 꼬마, 15살에 '사내들의 대장'이 되다
이 청룡사 불당골 남사당패에 조선 전체를 뒤흔들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한 어린 소녀가 들어온 것입니다. 본명이 ‘김암덕’이었던 이 아이는 겨우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남사당패에 맡겨졌습니다. 가난 때문에 부모가 눈물을 머금고 거친 사내들의 손에 아이를 넘긴 것이죠. 바위처럼 단단하고 덕스럽게 자라라는 의미로 '바우덕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거친 사내들 틈에서 잡일을 하며 자란 바우덕이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였습니다. 남들이 평생을 걸쳐도 배우기 힘든 풍물놀이, 살판(땅재주), 버나(대접 돌리기) 등의 기술을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했습니다.
바우덕이 축제 줄타기
특히 남사당놀이의 꽃이자 가장 위험한 종목인 ‘어름(줄타기)’에서 그녀의 재능은 완전히 만개했습니다. 어른 남성들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서, 바우덕이는 마치 평지를 걷듯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이 나온다, 줄 위에 오르니 돈이 쏟아진다"라는 구전 민요가 동네방네 퍼질 정도로, 그녀가 장터에 떴다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전국을 뒤흔든 탑스타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러던 바우덕이의 나이 고작 15살이 되던 해,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우두머리)가 세상을 떠나자, 거친 사내들이 나이와 성별이라는 두꺼운 편견의 벽을 깨고 바우덕이를 만장일치로 최고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추대해 버린 것입니다. 혈연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실력과 카리스마’ 하나로 거친 유랑패 사내들을 호령하는 10대 여성 리더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3.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사로잡은 전설의 줄타기
바우덕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한양(서울)에서 찾아옵니다. 당시 권력의 정점이었던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세우기 위해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공사로 인해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걷고,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면서 일꾼들의 불만은 원망을 넘어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거대한 경복궁 공사장은 늘 서슬 퍼런 긴장감과 피로감만 감돌고 있었습니다.
남사당패
일꾼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폭동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흥선대원군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리꾼과 예술가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이 거대한 무대에 안성 남사당패와 앳된 얼굴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등판하게 됩니다.
허공에 매달린 외줄 위로 바우덕이가 가볍게 날아오르자, 숨을 죽이던 수천 명의 일꾼들은 순식간에 환호성을 쏟아냈습니다. 줄 위에서 자유자재로 뒤공중잡기(덤블링)를 하고, 양반들의 가식과 위선을 시원하게 풍자하는 소리를 뱉어내는데, 그 모습이 팍팍한 노역에 지쳐있던 일꾼들의 마음을 완전히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공사장은 순식간에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감동의 축제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이 모습을 직접 지켜본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천민이었던 바우덕이를 따로 불러 치하하고, 정삼품 당상관(지금의 고위 공무원) 벼슬아치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옥관자(玉貫子)’를 하사했습니다. 천민이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신분 인정을 받은 유례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안성남사당패는 자신들의 깃발에 이 옥관자를 달고 다녔으며, 이들이 장터에 나타나면 전국의 다른 유랑패들이 알아서 길을 비키며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4. 24살에 멈춘 가녀린 불꽃,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줄 위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전국 각지의 거친 흙바람을 마시고 밤낮으로 몸을 혹사해야 했던 유랑 생활은 결국 그녀의 작은 몸을 갉아먹었습니다. 온몸을 던져 서민들에게 웃음과 위로를 선물했던 바우덕이는 안타깝게도 겨우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병(결핵)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맙니다.
바우덕이 축제 줄타기
그녀가 안성 청룡사 인근의 차가운 냇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을 때, 그녀의 공연을 보며 시름을 잊었던 수많은 조선의 민중들이 자식을 잃은 듯 통곡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짧았던 24년의 생애 동안 그녀는 불꽃처럼 온몸을 태워 조선 전체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떠난 것입니다.
비록 바우덕이라는 예인의 삶은 짧게 끝났지만, 그녀가 남긴 위대한 예술 혼과 당당한 기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분의 벽도, 성별의 한계도 오직 실력 하나로 다 깨부수었던 15살 꼭두쇠 소녀 바우덕이. 그녀가 보여준 당당함은 오늘날 ‘남사당놀이’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거대한 결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성별과 신분의 한계를 오직 실력 하나로 깨부순 서사가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매년 안성에서 열리는 바우덕이 축제는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한 천재 예인의 에너지를 직관할 수 있는 기회인 셈입니다.
오늘날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생각보다 매우 최근의 일입니다.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치는 오직 남성만의 영역이었습니다. 여성은 가정을 돌보는 존재일 뿐,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자격이 없다는 편견이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그 결과 여성들은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면서도 정작 자신들을 대표할 사람을 직접 선택할 권리는 없었습니다. 이 권리를 얻기 위해 세계 곳곳의 여성들은 거리로 나섰고, 감옥에 갇혔으며, 단식투쟁을 벌였고, 심지어 목숨까지 희생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했을까요? 대한민국은 서구보다 민주주의가 늦게 시작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투표권은 서구보다 무려 100년이나 빨랐습니다. 1948년 건국과 동시에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동일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한 나라였습니다. 서구 국가들이 수십 년, 길게는 한 세기에 걸쳐 단계적으로 여성 참정권을 확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위대한 출발이었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던 시대의 슬픈 상식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당시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편견 어린 인식들이 아주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여성의 역할은 가정이다."
"정치는 남성이 하는 일이다."
"여성의 의견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대신 대표하면 된다."
이러한 편견 때문에 여성들은 투표를 할 수도 없었고, 국회의원이나 공직 후보로 출마할 수도 없었으며,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회 질서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참정권, 뉴질랜드가 열어젖힌 희망의 길
여성 참정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나라는 뉴질랜드입니다. 뉴질랜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국회의원 선거 투표권을 부여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변화의 중심에는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그녀는 젊은 시절 뉴질랜드로 이주한 뒤 '기독교여성금주동맹'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금주 운동이 목적이었지만,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에게 정치적 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며 의회에 끊임없이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청원: 여성 투표권 도입을 요구했지만 의회로부터 즉시 거절당했습니다.
두 번째 청원: 포기하지 않고 약 9천 명의 서명을 모았지만 또다시 부결되었습니다.
세 번째 청원: 이번에는 2만 명이 넘는 서명을 모아 하원은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거부당했습니다.
마지막 청원: 무려 3만 2천여 명이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당시 뉴질랜드 전체 여성 인구의 약 4분의 1이 참여한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마침내 의회는 찬성 20표, 반대 18표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총독의 서명으로 여성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청원서는 오늘날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 뉴질랜드 지폐에는 그녀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르지만, 당시 뉴질랜드 여성들은 '투표(선거권)'만 할 수 있었을 뿐, 선거에 '출마(피선거권)'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성이 국회의원 후보가 될 수 있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더 흐른 뒤였고, 실제 첫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계 최초의 국가였음에도 완전한 정치적 평등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영국 여성들의 눈물겹고 처절했던 투쟁
영국에서는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기 위해 훨씬 더 치열하고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는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을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대규모 시위, 정치 집회, 낙선운동, 의회 앞 시위 등을 공격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1908년 10월 11일,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에멀라인 팽크허스트가 군중에게 연설하는 역사적인 장면1910년 6월 18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대규모 여성 참정권 시위(서프러제트 행진)1914년 5월 22일, 버킹엄 궁전 밖에서 에멀라인 팽크허스트가 경찰에게 체포당하는 역사적인 순간
정부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고 수많은 여성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여성들은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고, 정부는 입을 강제로 벌려 음식을 먹이는 '강제 급식'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팽크허스트는 수없이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에밀리 데이비슨의 숭고한 희생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가장 가슴 아픈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은 국왕의 경주마 앞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며 "여성에게 참정권을!"이라고 외쳤고, 결국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영국 사회 전체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고, 여성 참정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
흑인 남성보다도 순위가 밀렸던 미국의 참정권
미국 역시 처음부터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1870년 헌법 수정을 통해 흑인 남성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될 때도 여성은 철저히 제외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주에서 차례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전역에서 모든 여성이 온전하게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1920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습니다.
1917~1918년경 미국에서 전개된 여성 참정권(투표권) 요구 운동의 역사적 현장
사진 속 여성들이 높이 들고 있는 대형 배너에는 "윌슨 대통령이 말하기를: '지금은 여성 참정권을 지지할 때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문구는 단순한 응원이나 지지가 아닙니다. 당시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펼쳤던 아주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숨어 있는 순간입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대외적으로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연설했습니다. 이에 여성 운동가들은 대통령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백악관 앞으로 나섰습니다.
"다른 나라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고 피를 흘리면서, 왜 정작 자국의 여성 절반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투표권조차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며 대통령의 모순을 날카롭게 정면으로 꼬집은 것입니다. 성조기를 높이 들고 어깨띠를 두른 채 비장하게 서 있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결의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백악관 앞을 지켰던 이들의 끈질긴 시위와 압박 끝에 윌슨 대통령은 결국 백기를 들고 지지를 선언했으며, 이는 1920년 미국 전역에서 여성 참정권이 완전히 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참정권을 얻기까지 걸린 기나긴 세월
민주주의의 고향이라 불리는 프랑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참정권을 얻기까지 매우 기나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 시기에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가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당당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그 후 여성 단체들은 전면 해산되었고 집회조차 금지당했습니다.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프랑스 여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참정권을 얻지 못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4년에야 법적으로 인정되어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새로운 헌법에서 이 평등 원칙이 다시 한번 재확인되었습니다.
서구 선진국보다 대한민국이 100년이나 빨랐던 이유
많은 이들이 서구 선진국이 민주주의와 평등의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생각하지만, 남성에게 처음 투표권이 주어지고 여성까지 동등해지기까지 걸린 '지체 시간'을 비교해 보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앞서 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약 96년 소요): 1848년 성인 남성 보통선거가 도입된 후, 프랑스 여성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기까지 거의 한 세기(96년)가 걸린 1944년에야 참정권을 얻었습니다.
미국 (약 50년 소요): 1870년 남성 참정권 확대 이후, 여성이 철저히 제외되는 진통을 겪으며 1920년이 되어서야 미국 전역에서 인정되었습니다.
영국 (약 10년 소요): 1918년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후, 성별과 재산 기준을 완전히 없애고 여성과 100% 동등해진 것은 1928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0년, 즉시 완료):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제정된 제헌헌법을 통해, 단 하루의 차별이나 지체 시간도 없이 시작부터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완벽하게 동등하게 전격 보장했습니다.
서구 국가들이 피를 흘리며 오랜 세월 계급과 성별에 따라 투표권을 조금씩 쪼개어 주었던 단계를, 대한민국은 단숨에 뛰어넘어 시작부터 '완성형 보통선거' 체제를 채택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왜 이것이 가능했을까? 모든 시작은 '3·1 독립운동'이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당당하게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서울(경성) 종로 거리에 모인 남녀노소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역사적 순간
서구 선진국들이 피를 흘리며 수십 년간 겪었던 갈등을 대한민국이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1919년 3월 1일에 발발한 역사적인 독립운동, 즉 '3·1운동(March 1st Movement)'에 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혹독한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정치는커녕 국민이라는 기본 개념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암흑기였습니다. 이 억압에 맞서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전국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주권 국가임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비폭력 만세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느 날 책상 위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바로 이 거대한 비폭력 저항의 거리 위에서 국민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직접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전환점의 가장 중심에 바로 여성의 주체적인 등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활동은 집안으로 철저히 제한되어 있었고, 정치 참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3·1운동은 이 낡은 가부장적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여성들은 주도적으로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으며, 체포와 고문을 감수하며 독립의 당당한 주체로 나섰습니다. 이 순간 여성은 역사의 보조자가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동등한 '국민'이자 민주주의의 한 축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 뜨거운 평등의 열망은 곧바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 초안으로 이어졌습니다. 1919년 임시정부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원칙을 세우면서, 그 국민의 범주 안에 여성을 완벽하게 포함시켰습니다. 당시 서구 열강들조차 여성 참정권을 엄격히 제한하던 시기였음을 고려하면,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도 성별을 뛰어넘어 주권을 인정한 한국의 정신은 세계적으로도 엄청나게 앞선 것이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가장 먼저 세계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총도, 인형도 아닌 작은 설탕 과자 하나였습니다.
바로 달고나였습니다.
오징어게임의 한장면
외국인들은 드라마 속 참가자들이 바늘 하나로 설탕 과자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고, 유튜브와 틱톡에는 달고나를 직접 만들어 도전하는 영상이 끝없이 올라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너무도 익숙했던 추억이 어느 날 세계적인 놀이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달고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이었고, 학교 앞 풍경이었으며, 어린 시절의 냄새와 소리가 담긴 기억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쪽자'였다.
제가 자란 경상도에서는 달고나를 '쪽자'라고 불렀습니다. 지역마다 이름은 참 다양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뽑기'나 '찍어먹기', 충청도에서는 '띠기', 대구·경북에서는 '국자'나 '파짜꿍', 부산·경남에서는 '쪽자', '하치', '노카묵기'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름은 달랐지만 만드는 모습은 모두 같았습니다.
양은 국자에 설탕을 넣고 연탄불 위에서 천천히 녹입니다. 설탕이 맑게 녹으면 소다를 아주 조금 넣어 부풀리고, 철판 위에 부은 뒤 둥근 누름판으로 납작하게 누릅니다. 마지막으로 별, 하트, 우산, 동그라미 같은 틀을 찍어내면 달콤한 쪽자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진짜 승부가 시작됩니다. 바늘 하나로 모양을 깨지 않고 떼어내면 하나를 더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작은 설탕 과자 하나를 얻기 위해 모두가 숨을 죽이고 혀를 내밀며 집중하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납니다.
버스비보다 군것질이 더 중요했던 시절
그 시절 학교는 꽤 멀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버스비를 손에 쥐여 주셨지만, 친구들과 저는 버스를 타기보다 걸어 다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버스비를 아껴 군것질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학교 앞에는 언제나 유혹이 넘쳐났습니다.
쪽자, 떡볶이, 빙설, 쫀드기, 아폴로, 눈깔사탕,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이름도 모를 불량식품들까지.지금 먹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들이었습니다. 배는 늘 고팠고 용돈은 늘 부족했습니다. 엄마를 따라다니며 조르던 일도 아직 생생합니다. 하루에 딱 100원이 용돈이 었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너무 부족해 보여서 야속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지금은 가장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학교 앞 불량식품
집에서 몰래 만들던 쪽자
어느 날 집에서 소다와 설탕을 발견했습니다. '이걸로 집에서도 만들 수 있잖아?' 연탄불 위에 국자를 올리고 설탕을 녹였습니다. 가게에서 먹던 그 냄새가 집안에 퍼졌고, 완성된 쪽자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새까맣게 그을린 국자.
아무리 닦아도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어머니는 국자를 보자마자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날 저는 다시는 달고나를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새 국자가 생기자마자 그 다짐은 며칠도 가지 못했습니다. 달고나의 유혹은 그만큼 강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동생들과 달고나를 집에서 만들어 먹다가 국자는 타버리고 그릇에는 달고나가 덕지 덕지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자와 그릇을 집안 어딘가에 몰래 감춰두었습니다. 어머니는 국자가 없어 졌다고 계속 찾으셨지만 저와 동생들은 모르는 척을 열심히 했습니다.
달고나와 쌍벽을 이루던 왕잉어 뽑기
학교 앞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던 곳은 달고나 가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옆에는 늘 아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또 하나의 인기 놀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왕잉어 뽑기였습니다.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지만, 당시 아이들에게는 달고나만큼이나 인기 있던 추억의 놀이였습니다. 게임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먼저 유리판에는 1번부터 80번까지 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잉어', '거북선', '청용도', '칼', '붕어', '용' 등 상품 이름이 적힌 작은 유리 조각이나 막대를 원하는 번호 위에 올려놓습니다. 모든 상품을 배치한 뒤에는 번호가 적힌 제비를 하나 뽑습니다.
내가 뽑은 번호와 상품이 놓여 있는 번호가 일치하면 그 상품에 해당하는 설탕 뽑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46번을 뽑았는데 그 자리에 '청용도'가 놓여 있었다면 청용도 모양의 설탕 뽑기를 받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가장 탐내던 것은 단연 왕잉어 혹은 호랑이 였습니다.
왕잉어나 호랑이는 다른 뽑기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습니다. 하나만 손에 들고 있어도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을 만큼 귀한 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잉어나 호랑이가 적힌 번호를 맞힐 확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대부분은 작은 붕어나 칼이 나오거나, 아무것도 없는 꽝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될지도 몰라.'
그 작은 희망 하나로 주머니 속 마지막 동전까지 꺼내곤 했습니다. 아이들 사이에는 나름의 비법도 있었습니다. 번호표의 모양이나 닳은 흔적을 외워 원하는 번호를 골라내려는 아이들도 있었고, 주인아주머니도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으며 넘어가곤 했습니다. 오히려 꽝이 계속 나오면 "한 번 더 해봐." 하며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인심도 흔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호랑이나 왕잉어를 정말 잘 뽑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뽑기를 하시면 큰 걸 뽑으셔서 늘 저는 제가 뽑지도 않았지만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선심 쓰듯이 나눠줬습니다. 우리 아빠는 뽑기 대장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돈을 버는 장사라기보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놀이판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설탕보다 달콤했던 것은 추억이었다.
오징어 게임 덕분에 달고나는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달고나는 단순한 설탕 과자가 아니었습니다. 연탄불 위에서 설탕을 녹이던 골목 풍경이 있었으며, 국자를 태워 어머니께 혼나던 기억까지 함께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달고나와 함께 학교 앞을 지키던 또 하나의 추억, 왕잉어 뽑기도 있었습니다.
달고나가 손끝의 집중력을 겨루는 놀이였다면, 왕잉어 뽑기는 작은 행운을 기다리는 설렘의 놀이였습니다. 둘 다 설탕으로 만든 단순한 과자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학교 앞 풍경도, 연탄불도, 군것질을 사 먹던 동전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덕분에 달고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고, 비록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잔인한 영화 라는 것이 씁슬 하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어린 시절도 잠시나마 함께 깨어났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달고나의 달콤한 맛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놀던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