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바우덕이 축제

 

가을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정말 많은 축제가 열립니다. 예쁜 꽃구경이나 맛있는 먹거리도 참 좋지만, 혹시 경기도 안성에서 매년 열리는 '바우덕이 축제'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바우덕이가 대체 누구지? 사람 이름인가?" 하고 생소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조선 시대에 철저했던 계급 사회를 오직 '실력 하나'로 정면 돌파했던 천재 여성 아티스트입니다. 교과서에서는 깊게 다루지 않지만, 알면 알수록 가슴이 뭉클해지고 영화보다 더 극적인 바우덕이와 남사당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주 자세하게 들려드리겠습니다.

1. 노비보다 낮았던 천민들의 서글픈 유랑, 남사당패

이야기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장터를 돌며 노래하고 줄을 타던 '남사당패'는 지금으로 치면 대중문화를 이끌던 연예인이지만, 그 시절에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천민 중의 천민'이었습니다. 심지어 일반 노비들은 주인이라도 있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나라에서 보호받지 못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절한 유랑의 길을 걸었습니다. 일종의 '법 밖의 사람들'이었던 셈입니다.
남사당패와 바우덕이.
게다가 이 조직은 거친 사내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다니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무리였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이 대중 앞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금기였기 때문에, 남사당패에서 여성 역할이 필요할 때는 젊은 남사당 사내가 치마를 입고 여장을 한 채 공연을 펼쳤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을 '여장 남자'라는 뜻으로 가열(가얏고를 타는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험악하고 거친 무리가 정착하여 겨울을 나고 기예를 갈고닦던 본거지가 바로 경기도 안성의 서운산 자락에 있는 ‘청룡사’라는 사찰이었습니다. 당시 청룡사는 재정적으로 무척 핍절한 상태였는데, 남사당패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신변을 보호해 주는 대신 공연 수익의 일부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사찰에서는 신도들이 천민들과 엮이는 걸 꺼렸지만, 절을 유지하기 위해 이 유랑 예인 집단과 은밀한 상부상조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특히 안성은 전국의 온갖 장사꾼과 물산이 모여드는 조선 최대의 장터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남사당패가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달래주며 그들만의 독보적인 기예를 완성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2. 5살에 입단한 꼬마, 15살에 '사내들의 대장'이 되다

이 청룡사 불당골 남사당패에 조선 전체를 뒤흔들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한 어린 소녀가 들어온 것입니다. 본명이 ‘김암덕’이었던 이 아이는 겨우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남사당패에 맡겨졌습니다. 가난 때문에 부모가 눈물을 머금고 거친 사내들의 손에 아이를 넘긴 것이죠. 바위처럼 단단하고 덕스럽게 자라라는 의미로 '바우덕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거친 사내들 틈에서 잡일을 하며 자란 바우덕이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였습니다. 남들이 평생을 걸쳐도 배우기 힘든 풍물놀이, 살판(땅재주), 버나(대접 돌리기) 등의 기술을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했습니다.
바우덕이 축제 줄타기
 
특히 남사당놀이의 꽃이자 가장 위험한 종목인 ‘어름(줄타기)’에서 그녀의 재능은 완전히 만개했습니다. 어른 남성들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서, 바우덕이는 마치 평지를 걷듯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이 나온다, 줄 위에 오르니 돈이 쏟아진다"라는 구전 민요가 동네방네 퍼질 정도로, 그녀가 장터에 떴다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전국을 뒤흔든 탑스타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러던 바우덕이의 나이 고작 15살이 되던 해,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우두머리)가 세상을 떠나자, 거친 사내들이 나이와 성별이라는 두꺼운 편견의 벽을 깨고 바우덕이를 만장일치로 최고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추대해 버린 것입니다. 혈연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실력과 카리스마’ 하나로 거친 유랑패 사내들을 호령하는 10대 여성 리더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3.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사로잡은 전설의 줄타기

바우덕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한양(서울)에서 찾아옵니다. 당시 권력의 정점이었던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세우기 위해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공사로 인해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걷고,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면서 일꾼들의 불만은 원망을 넘어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거대한 경복궁 공사장은 늘 서슬 퍼런 긴장감과 피로감만 감돌고 있었습니다.

남사당패

일꾼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폭동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흥선대원군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리꾼과 예술가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이 거대한 무대에 안성 남사당패와 앳된 얼굴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등판하게 됩니다.
허공에 매달린 외줄 위로 바우덕이가 가볍게 날아오르자, 숨을 죽이던 수천 명의 일꾼들은 순식간에 환호성을 쏟아냈습니다. 줄 위에서 자유자재로 뒤공중잡기(덤블링)를 하고, 양반들의 가식과 위선을 시원하게 풍자하는 소리를 뱉어내는데, 그 모습이 팍팍한 노역에 지쳐있던 일꾼들의 마음을 완전히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공사장은 순식간에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감동의 축제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이 모습을 직접 지켜본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천민이었던 바우덕이를 따로 불러 치하하고, 정삼품 당상관(지금의 고위 공무원) 벼슬아치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옥관자(玉貫子)’를 하사했습니다. 천민이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신분 인정을 받은 유례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안성남사당패는 자신들의 깃발에 이 옥관자를 달고 다녔으며, 이들이 장터에 나타나면 전국의 다른 유랑패들이 알아서 길을 비키며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4. 24살에 멈춘 가녀린 불꽃,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줄 위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전국 각지의 거친 흙바람을 마시고 밤낮으로 몸을 혹사해야 했던 유랑 생활은 결국 그녀의 작은 몸을 갉아먹었습니다. 온몸을 던져 서민들에게 웃음과 위로를 선물했던 바우덕이는 안타깝게도 겨우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병(결핵)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맙니다.

 

바우덕이 축제 줄타기

그녀가 안성 청룡사 인근의 차가운 냇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을 때, 그녀의 공연을 보며 시름을 잊었던 수많은 조선의 민중들이 자식을 잃은 듯 통곡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짧았던 24년의 생애 동안 그녀는 불꽃처럼 온몸을 태워 조선 전체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떠난 것입니다.

 
비록 바우덕이라는 예인의 삶은 짧게 끝났지만, 그녀가 남긴 위대한 예술 혼과 당당한 기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분의 벽도, 성별의 한계도 오직 실력 하나로 다 깨부수었던 15살 꼭두쇠 소녀 바우덕이. 그녀가 보여준 당당함은 오늘날 ‘남사당놀이’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거대한 결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성별과 신분의 한계를 오직 실력 하나로 깨부순 서사가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매년 안성에서 열리는 바우덕이 축제는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한 천재 예인의 에너지를 직관할 수 있는 기회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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