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가장 먼저 세계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총도, 인형도 아닌 작은 설탕 과자 하나였습니다.
바로 달고나였습니다.

외국인들은 드라마 속 참가자들이 바늘 하나로 설탕 과자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고, 유튜브와 틱톡에는 달고나를 직접 만들어 도전하는 영상이 끝없이 올라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너무도 익숙했던 추억이 어느 날 세계적인 놀이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달고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이었고, 학교 앞 풍경이었으며, 어린 시절의 냄새와 소리가 담긴 기억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쪽자'였다.

제가 자란 경상도에서는 달고나를 '쪽자'라고 불렀습니다. 지역마다 이름은 참 다양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뽑기'나 '찍어먹기', 충청도에서는 '띠기', 대구·경북에서는 '국자'나 '파짜꿍', 부산·경남에서는 '쪽자', '하치', '노카묵기'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름은 달랐지만 만드는 모습은 모두 같았습니다.
양은 국자에 설탕을 넣고 연탄불 위에서 천천히 녹입니다. 설탕이 맑게 녹으면 소다를 아주 조금 넣어 부풀리고, 철판 위에 부은 뒤 둥근 누름판으로 납작하게 누릅니다. 마지막으로 별, 하트, 우산, 동그라미 같은 틀을 찍어내면 달콤한 쪽자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진짜 승부가 시작됩니다. 바늘 하나로 모양을 깨지 않고 떼어내면 하나를 더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작은 설탕 과자 하나를 얻기 위해 모두가 숨을 죽이고 혀를 내밀며 집중하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납니다.
버스비보다 군것질이 더 중요했던 시절
그 시절 학교는 꽤 멀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버스비를 손에 쥐여 주셨지만, 친구들과 저는 버스를 타기보다 걸어 다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버스비를 아껴 군것질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학교 앞에는 언제나 유혹이 넘쳐났습니다.
쪽자, 떡볶이, 빙설, 쫀드기, 아폴로, 눈깔사탕,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이름도 모를 불량식품들까지. 지금 먹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들이었습니다. 배는 늘 고팠고 용돈은 늘 부족했습니다. 엄마를 따라다니며 조르던 일도 아직 생생합니다. 하루에 딱 100원이 용돈이 었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너무 부족해 보여서 야속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지금은 가장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집에서 몰래 만들던 쪽자
어느 날 집에서 소다와 설탕을 발견했습니다. '이걸로 집에서도 만들 수 있잖아?' 연탄불 위에 국자를 올리고 설탕을 녹였습니다. 가게에서 먹던 그 냄새가 집안에 퍼졌고, 완성된 쪽자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새까맣게 그을린 국자.
아무리 닦아도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어머니는 국자를 보자마자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날 저는 다시는 달고나를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새 국자가 생기자마자 그 다짐은 며칠도 가지 못했습니다. 달고나의 유혹은 그만큼 강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동생들과 달고나를 집에서 만들어 먹다가 국자는 타버리고 그릇에는 달고나가 덕지 덕지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자와 그릇을 집안 어딘가에 몰래 감춰두었습니다. 어머니는 국자가 없어 졌다고 계속 찾으셨지만 저와 동생들은 모르는 척을 열심히 했습니다.
달고나와 쌍벽을 이루던 왕잉어 뽑기
학교 앞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던 곳은 달고나 가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옆에는 늘 아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또 하나의 인기 놀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왕잉어 뽑기였습니다.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지만, 당시 아이들에게는 달고나만큼이나 인기 있던 추억의 놀이였습니다. 게임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먼저 유리판에는 1번부터 80번까지 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잉어', '거북선', '청용도', '칼', '붕어', '용' 등 상품 이름이 적힌 작은 유리 조각이나 막대를 원하는 번호 위에 올려놓습니다. 모든 상품을 배치한 뒤에는 번호가 적힌 제비를 하나 뽑습니다.
내가 뽑은 번호와 상품이 놓여 있는 번호가 일치하면 그 상품에 해당하는 설탕 뽑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46번을 뽑았는데 그 자리에 '청용도'가 놓여 있었다면 청용도 모양의 설탕 뽑기를 받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가장 탐내던 것은 단연 왕잉어 혹은 호랑이 였습니다.
왕잉어나 호랑이는 다른 뽑기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습니다. 하나만 손에 들고 있어도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을 만큼 귀한 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잉어나 호랑이가 적힌 번호를 맞힐 확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대부분은 작은 붕어나 칼이 나오거나, 아무것도 없는 꽝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될지도 몰라.'
그 작은 희망 하나로 주머니 속 마지막 동전까지 꺼내곤 했습니다. 아이들 사이에는 나름의 비법도 있었습니다. 번호표의 모양이나 닳은 흔적을 외워 원하는 번호를 골라내려는 아이들도 있었고, 주인아주머니도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으며 넘어가곤 했습니다. 오히려 꽝이 계속 나오면 "한 번 더 해봐." 하며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인심도 흔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호랑이나 왕잉어를 정말 잘 뽑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뽑기를 하시면 큰 걸 뽑으셔서 늘 저는 제가 뽑지도 않았지만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선심 쓰듯이 나눠줬습니다. 우리 아빠는 뽑기 대장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돈을 버는 장사라기보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놀이판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설탕보다 달콤했던 것은 추억이었다.
오징어 게임 덕분에 달고나는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달고나는 단순한 설탕 과자가 아니었습니다. 연탄불 위에서 설탕을 녹이던 골목 풍경이 있었으며, 국자를 태워 어머니께 혼나던 기억까지 함께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달고나와 함께 학교 앞을 지키던 또 하나의 추억, 왕잉어 뽑기도 있었습니다.
달고나가 손끝의 집중력을 겨루는 놀이였다면, 왕잉어 뽑기는 작은 행운을 기다리는 설렘의 놀이였습니다. 둘 다 설탕으로 만든 단순한 과자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학교 앞 풍경도, 연탄불도, 군것질을 사 먹던 동전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덕분에 달고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고, 비록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잔인한 영화 라는 것이 씁슬 하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어린 시절도 잠시나마 함께 깨어났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달고나의 달콤한 맛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놀던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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